지난 블로그 포스팅 이후로 한달이 훌쩍 지났다. 뭔가 쓰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켠에 남겨둔 채로 하루하루를 흘려 보내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사이 달이 넘어가 버린 것. 각종 프로젝트며 하루를 꽉 채운 미팅 일정들로 바쁘게 살았을 때보다 캘린더가 비어있는 지금,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캘린더에 등록한 일정은 거의 없었지만 지난 한 달여의 시간은 그래도 나름 뭔갈 하며 보냈다.
먼저 1년여간 개인 사무실로 사용하던 공유 오피스를 정리하고 작은 작업실을 얻어 이사를 했다. 공유 오피스를 쓰는 동안 출석률은 민망할 만큼 저조했다. 1년 동안 낸 임대료를 생각하면 속이 쓰릴 정도였다. 그래도 그 공간이 있어 다행이었던 건, 공간을 핑계 삼아 사람들을 만나고 해야 할 일을 만들 수 있었다는 점이다. 보통은 필요가 있어서 공간을 얻지만 나는 공간을 얻었기에 필요를 만들어 왔다.
사무실의 임대 갱신 여부를 고민하던 즈음 각각 삶의 다음 챕터를 고민하고 계신 두 분과 짧은 베트남 여행을 갔다. 닌빈의 숙소에서 사무실을 유지할지 고민이라고 털어놓자 같이 갔던 E님이 구경만 하고 있던 매물이라며 보여준 공간. 이곳이 앞으로 E님과 나의 필요를 만들 공간이 되었다.


올 초 부터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openclaw로 작업 환경을 꾸렸다. openclaw는 쉽게 얘기하면 내 컴퓨터 자원을 쓸 수 있는 AI 도구다. 다만 내가 원하는 메세지 채널을 설정할 수 있는. 사실상 ChatGPT나 Claude 같은 챗 서비스 안에서도 skills, mcp를 통해 openclaw를 통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용해보니 내 개인용 컴퓨터 안의 작업 공간, 나에게 익숙한 메세지 채널 — Slack 의 힘이 강력하다 느꼈다. 나에게 익숙한 환경에서 AI와 일하는 방식을 구성할 수 있다는 면에서.
혼자 사용하고 있던 슬랙 워크스페이스에 에이전트 넷을 초대했다. 각각의 정체성과 역할을 설정하고 성격을 부여하면서 해당 성격에 잘 어울리는 이름과 얼굴도 만들어 줬다. 은서, 도윤, Jun, 단이 이 친구들의 이름이다. (SOUL.md를 작성한 직후 어울리는 이름을 달라고 해서 제안된 이름들 중 괜찮아 보이는 걸로 내가 골라줬다.)
도윤은 주기적으로 X, 레딧 등의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제품 아이디어를 모아 문제 / 타겟유저 / MVP 기능으로 정리해 슬랙에 공유한다. 이 아이디어들을 살펴보다가 흥미롭거나 내 관심사와 맞는 것이 있으면 은서와 함께 문제를 구체화 하며 PRD로 작성한다. PRD가 잘 다듬어지면 Lovable, v0 같은 AI 빌더툴로 MVP 스펙을 구현한다. 실제 프로젝트로 굴러가기 시작하면 각각의 워크스페이스에 프로젝트를 설정하고 기능의 계획, 설계, 구현 과정을 나와 논의하거나 서로의 피드백을 거쳐 작업하고 리뷰한다. 내 워크스테이션에서의 작업(주로 Claude Code를 통한)도 여기에 포함된다. 꽤 복잡한 서비스를 구현하는데 들어가는 시간 역시 요즘 얘기하는 ‘딸깍’ 수준은 아니지만 상상을 초월하게 빠르다. 그러다보니 정작 계획 과정에서 AI가 기존의 개발 과정에 기반한 일정을 산정(e.g. A, B 기능 개발 2-3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웃프기도 하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새로운 도구들, Skills, AI를 잘 쓰기 위한 방법론들이 쏟아진다. 정보와 도구의 홍수 속에서 정작 인간에게 꼭 필요한 희귀한 자원은 주제와 집중력이라는 생각이 커진다. 슬랙으로 매일 배달되는 아이디어들 속에서 내가 반복해서 붙드는 질문은 무엇인가.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 내 관심이 계속 흐르는 방향은 어디인가.
만들 수 있는 것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무엇을 만들 것인지 정하는 일이 더 어려워진다. 예전에는 아이디어와 자원이 부족해 못 만들었다면 지금은 너무 많은 정보와 자원 속에서 하나를 오래 붙들기가 어렵다. 대충 그럴듯한 문제 정의와 MVP는 빠르게 나올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일이 내게 중요한 주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요즘 더 필요한 것은 팔리는 아이디어를 찾는 감각보다 여러 가능성 중에서 내가 계속 돌아갈 질문을 알아보는 감각에 가깝다.
집중력은 마치 매주 n회 이상 운동을 해야 겨우 유지되는 코어 근육 같다. AI의 빠른 작업들을 실제 생산력으로 전환하려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 쪽의 집중력이 필수적이다. 빠른 정보와 업데이트 속에서도 목적과 맥락을 잃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에이전트에 일을 맡겨 둔 짧은 시간 사이에도 짧은 콘텐츠나 메시지 같은 것들이 겨우 유지되던 얕은 집중력마저 쉽게 흩어버린다.
AI 덕분에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런데 그럴수록 바깥의 속도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오래 붙들 질문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의 속도가 내게 맞는지 자주 돌아보게 된다. 결국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가능성보다, 그 많은 가능성 사이에서 주제와 집중력을 조금 덜 잃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당분간은 바깥의 속도보다 내 쪽의 리듬을 조금 더 자주 돌아보게 될 것 같다.
오랜만입니다. 이 정도의 주기가 허송세월 블로그에는 딱 맞는 것 같네요. ㅎㅎㅎ
글을 읽고 감상이나 나누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joyeon@gmail.com 으로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