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새해 계획은 미뤄둔 채, 하노이에서

2026년 1월 7일, 올해의 첫 수요일.

허송세월 블로그를 시작하기로 한 작년 12월 31일로부터 딱 일주일 뒤, 베트남 하노이의 호안끼엠 호수 근처 스타벅스 2층에 앉아 있다. 닌빈으로 짧은 여행을 함께한 두 분은 어제 밤에 먼저 귀국하시고 혼자 남았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있던 지난 사흘 내내 파란 하늘을 그렇게도 바랐건만 오늘에서야 맑아진 하늘이 못내 야속한 아침이다.

짧은 산책 후 고요해진 마음으로 떠올리는 2026이라는 숫자가 아직은 영 낯설다. 그래도 새해는 새해기에 차분하게 올해의 계획을 세워볼까 하다가 계획 없이 지내온 지난 1년의 시간이 밀린 숙제처럼 남아있어 계획을 세운다는 계획을 살짝 미뤄본다.

계획을 세우는 것은 마음에 안정을 준다. 그렇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돌아보면 계획대로 된 것이 사실 별로 없는 것 같다.

2015년, YMS 비자를 받아 영국으로 나가면서 유럽으로의 이민을 계획했지만 (당시 영국은 아직 EU 국가였다) 런던에서 시작한 스타트업(레디시)의 팀을 꾸리기 위해 비자 기한이었던 2년을 반도 못 채우고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동남아 시장을 깊게 배우고 시간이 날 때마다 구석구석 여행을 다녀보자 계획했던 베트남 체류 시절에는 갑자기 팬데믹이 닥쳐 아파트 단지에 갇혀 있었다.

20년 전, 개발자라는 커리어를 시작하게 해준 다음에서의 짧은 경험도 계획했던 일이 아니라 가족의 이민 계획이 무산되어 갑자기 허공에 붕 떠버린 시간을 채우려 찾은 아르바이트였다.

그럼에도 돌이켜보면, 지난 20여 년의 직업 생활은 나름의 방향을 갖고 흘러왔다.

정규 교육과정을 밟지 않았다는 핸디캡을 안고 시작한 직장 생활. 한명의 개발자로, 인정받는 팀원으로 자리잡으려 애썼던 시절에는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평가와 인정이 스스로에게 가장 큰 동기가 되어줬다. 새로운 도전과 더 큰 기회를 찾아 떠난 해외 생활에서는 돈 주고도 하지 못할 다양한 경험과 도전의 기회들을 얻으며 관점과 생각을 넓혀가는 과정이 보상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마치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던 20년 전처럼 아무런 방향이 없는 느낌이다. 방향은 그대로되 잠시 지쳐 멈춰있는 건지,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건지 아직은 결론을 내지 못한 상태다.

이유를 생각해 볼 시간이 많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해 본다.

먼저 “성장”이 삶의 주요 키워드였던 지난 시절, 나는 일을 마치 게임 속 퀘스트처럼 레벨업(성장)을 위한 경험치를 받을 수 있는 기회로 여긴 듯 하다. 일상과 비즈니스에 있는 문제를 푸는 것, 특히 더 복잡하거나 어려운 문제에 솔루션(기술, 제품, 조직)을 만들어내는 일을 더 큰 성장의 기회, 도전으로 여겨온 것이다. 하지만 산업이 성숙해짐에 따라 과거에 특별하게 여겨졌던 ‘어려운 문제를 푸는 능력’ 자체가 빠르게 일반화 되었다. 성장 중심 사고를 했던 기준에 따라 얘기하면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고 성장한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도구가 평준화 되면 차이는 실행력보다 선택의 기준에서 생긴다. 그렇기에 무엇을 어떻게 만들지 보다 내가,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가 더더욱 중요해졌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10년 전, 20년 전에 비해 여유로워진 재정적 상황도 하나의 이유가 된다. “생존을 위한 일”이라는 조건이 사라지자 정말 하고 싶은 일을 찾자는 목적이 좀 더 분명해진다. 한동안 허송세월을 보내더라도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의미있을거라는 믿음을 단단히 지지해준다.

회사의 신년 행사로 들렀던 2021년 1월 이후 5년만에 들른 하노이는 많이 변한 것도, 그렇지 않은 것도 같은 모습이다. 내연 기관 오토바이들의 통행을 2026년 까지로 제한한다는데 아직은 복잡하고 매연이 가득한 모습 그대로다. 동시에 도시를 채우는, 그새 조금은 더 세련된 상점들과 정돈된 거리는 빠른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도시가 변화에 대한 의지와 현실의 속도 사이에서 조금씩 형태를 만들어가듯, 나 역시 거창한 계획 보다는 매일의 결정 속에서 방향을 찾아가 보려 한다.




재작년 말, 전 회사 퇴사 즈음 트위터 피드에 뜬 수업 소개를 보고 충동적으로 에세이 쓰기 수업을 들었습니다. 6주 간 선생님이 매주 추천해주신 책을 읽고 숙제로 내주신 일기를 쓰고 검사받던 시간이 무척 힐링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노트에 혼자 써놓고 볼 일기를 뉴스레터까지 보내가며 공개하는 것이 부끄럽지만 저말고도 많은 분들이 각자의 허송세월을 보내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주 아님 ㅎㅎ) 그 시간들을 외롭지 않게 정비해 가는데 도움이 될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일단은 기록해 봅니다.

글을 읽고 나누고 싶은 얘기나 감상(?)이 있으시다면 joyeon@gmail.com 으로 부담 없이 메일 보내주세요. 코멘트나 좋아요 같은 일방적 소통보다는 양방향 소통을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