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2025년 (퇴사 후 1년) 회고

2025년 회고라고 했지만 시작은 살짝 앞당겨 2024년 4분기께로 돌아간다.

연결, 커피챗

전 회사를 나온 것은 CTO의 직함을 달고 있지만 내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인정한 이후에도 시간이 꽤 지난 뒤였다. 퇴사 이전부터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다양한 사람들과 커피챗을 했다. 업계와 직군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분들을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20년 가까이 이어온 테크 업계에서의 커리어에 대해 다시 돌아보고 싶기도 했고, 가만히 있다보면 안온한 회사 안의 문제나 주변의 문제에 천착해 버리기 십상이라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공유하며 넓은 시야를 유지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어떤 결론을 쫓기보다는, 가능한 다양한 가능성을 수집하고 싶은 상태였던 것 같다. 커피챗의 대상에는 제한이 없었기에 만난 분들의 경험과 분야는 다양했다. 가장 주된 주제는 그래도 개발자들의 조직 안에서의 성장통, 리더십 고민이었지만 전혀 다른 산업군이나 직무에 있는 분들이 마주한 현 시대에서의 생존에 대한 문제까지 다양했다. 작년 말까지도 간간히 이어진 커피챗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이 가진 문제와 접근 방식을 마주할 수 있었고 다들 각자의 자리에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과연 맞는 방향일까?”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자아성찰

퇴사 직후에 에세이 쓰기 수업을 들었다. 시인/작가 유진목 님이 트위터에 올리신 에세이 쓰기 1:1 비대면 수업 트윗을 보고 충동적으로 연락을 드렸다. 충동적이라고 한 이유는 그전까지 글쓰기 수업을 들어야겠다는 동기나 의지가 전혀 없었기 때문. 2024년 10월 말에 나는 동거인 겸 함께 강아지 육아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친구와 3주간 제주도에 다녀왔는데(물론 동거 강아지들도 함께) 수업은 비대면이었기 때문에 제주에 있는 동안에도 일주일에 한번씩 온라인으로 선생님을 뵐 수 있었다.

매 수업 사이, 선생님이 소개해주신 책을 읽는 것과 하루에 한편씩 일기를 쓰는 숙제가 주어졌다. 지난 10년 간 주로 써왔던 이메일, 제품 스펙, 채용을 위한 팀 소개 같이 업무에 필요한 글쓰기만 해왔던 나에게 일기 쓰기는 생각했던 것 보다 큰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선생님이 에세이로 가는 일기는 일상 중 한가지의 사건을 포착하고 거기에서 느낀 감정의 변화에 대해 쓰는 것이라 알려주셨는데 일상 속 기억에 남는 사건을 찾기도 어렵고 거기에서 느낀 감정을 찾아내는 건 더더욱 어려웠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내가 대문자 T 이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이렇게 문제를 정의하는 것으로 끝났을 것 같다. 일상 속 사건과 그에 따른 감정들을 발견하는 일은 첫째, 일을 하는데 있어 굳이 필요하지 않은 과정이기 때문에 비생산적이고 둘째, 노력해도 잘 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이걸 위해 노력하는 일이 비효율적이라 느껴졌다.

하지만 수업은 그 지점에서 끝나지 않았다. 일기 쓰기라는 숙제는 매일 해야했기에. 비생산적,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은 이것 외에 딱히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변명이 되지 않았다. 꾸준히 일기를 쓰면서 이 부분이 크게 개선이 되지는 않았지만 노력할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됐다. 일상 속 사건이 기억나지 않았던 것이나 느끼는 감정을 찾아 표현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들이 불필요하거나 사소해서가 아니라 일 중심의 사고 속에서 의식적으로 제외해왔기 때문이다. 성과로 이어지지 않는 생각이나 행동으로 연결되지 않는 감정들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부터인가 지워왔다.

6주간의 에세이 쓰기 수업은 나를 글잘러로 만들어주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돌아보는데 큰 도움이 됐다. 여전히 잘 하지 못하는 영역이지만 일상의 더 많은 순간을 기억하고 다양한 감정을 느끼며 사는 삶을 지향한다.

휴식, 그저 놀기

제주 3주 살기 이후에도 여행을 많이 다녔다. 2024년 연말은 짧게 상해에서 보냈다. 25년 1월에는 설 연휴에 홍콩에 간 덕분에 쇼핑이나 맛집을 즐기는 대신 드래곤스백 하이킹을 했다. 속초, 부산, 광주 등 국내 여행을 여럿 다녀왔다. 5월에는 치앙마이 한달살기를 했다. 한달간 치앙마이에서 스쿠터를 타고 다니고 싶어서 미루던 2종 소형 면허를 취득했다. 덕분에 도이수텝을 스쿠터로 오를 수 있었다. 가을에는 스위스 → 이탈리아 → 오스트리아 → 스페인 루트의 긴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세계 3대 자전거 대회 중 하나인 Vuelta A Espana의 결승을 보기 위해 계획한 여행이었지만 정작 결승은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시민들의 시위로 취소됐다. (부엘타 참가하는 팀 중, 이스라엘 프리미어테크라는 팀이 있다.)

‘인생에 다시 없을 휴식의 기회이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놀자’는 의지나 계획이 있던 건 아니다. 그저 특별한 방향이나 계획 없이 떠오르는 일들을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지난 몇년간 수도 없이 본 직장을 그만두고 떠난 여행 유튜버들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시도, 조바심

마냥 놀기만 하지는 않았다. 퇴사 이전부터 25년 초까지 몇 차례 제안들을 받고 검토했다. 이전의 경력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역할도 있었고, 전혀 다른 새로운 분야의 일도 있었다. 과분하고 감사한 제안이었지만 막상 선택의 순간에는 마음이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게 일이 됐든 내가 됐든 다시 돌아가기 이전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막연한 저항감이 컸던 것 같다. 몇번의 과정 끝에 어딘가 돌아갈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얘기를 나누게 되는 것이 송구스러운 마음에 링크드인에 일종의 독립선언을 했다.

이후에도 나름의 시도들이 있었다. 연중에 모 VC에서 컴퍼니 빌딩 형태의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무엇보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주도적으로 해볼 수 있겠다는 기대에 팀 빌딩을 준비하다가 잘 맞지 않는 조건으로 포기했다. 지분이나 돈 같은 문제는 아니고 이 프로젝트의 진행 여부를 고민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일에 대한 주도권의 문제였다.

당연히 조바심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보면 어떤 성과도 없는 한해였다. 일에서의 성과가 아니라면 책 100권 읽기, 자전거로 전국일주, 주 5회 운동으로 몸짱되기 같은 성과라도 있어야 하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작년의 시도들은 결과보다 과정에서 더 많은 힌트를 남겼다. 무엇에 쉽게 설득되지 않는지, 어떤 도전에서는 유난히 오래 고민하게 되는지를 스스로 관찰할 수 있었다. 동료들과 치열하게 일하며 의미있는 결과를 만들어 가는 것은 여전히 내 삶의 매우 크고 중요한 부분이다.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다시 기꺼이 뛰어들 수 있는 일을 찾기를 기대해 본다.




내년에 쓸 올해의 회고는 좀 더 일상의 사건들에 대한 해상도가 높은 회고이길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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