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6개월 동안의 여름

3년 반 동안의 배민 베트남 생활을 정리하며 남기는 두서없는 기록

베트남을 떠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회고(?)를 남긴다면 제목은 꼭 n 시간 동안의 여름이라고 해야지 생각했다. 아무래도 어떤 애니메이션 제목이 떠오르지만 (라고 쓰고나니 500일의 썸머라는 영화 제목도 있었지) 어쩐지 낭만 있어 보이니까. ㅎㅎ

아닌게 아니라 귀국해서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다른 계절이다. 베트남 동료들은 농담으로 “호치민에는 두개의 계절이 있다. 더운 여름과 겁나 더운 여름”이라고 하는데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더위의 여름을 가지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호치민 날씨는 비가 많이 오는 여름과 비가 오지 않는 여름 정도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계절에 변화가 없는 것에는 많은 장점이 있는데 그중 제일은 알러지성 비염 같은 온갖 환절기 질환들이 찾아올 타이밍을 찾지 못해 그냥 비켜간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엄청난 장점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맞는 겨울이 너무 반가운데 그 이유는 코로나로 더더욱 멈춰있던 것 같은 시간이 드디어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2018년 8월에 우아한 형제들에 입사해 그 바로 다음 달 말일에 베트남 호치민으로 나왔다. (한국 사람들이 간혹 헷갈려하는 것을 굳이 정리하자면 호치민이 남쪽, 수도인 하노이가 북쪽이다. 그리고 호치민은 구 사이공이다.) 그 이듬해 8월까지 Binh Thanh 군에 있는 Vin 그룹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 Vinhome Central Park에 기숙사처럼 모여 생활했다.

그러는 사이 2019년 5월에 베트남 배민을 런칭했다. 사실 이제와 말하지만 BAEMIN이라는 베트남에서는 아무 의미없는 단어를 서비스명으로 정할 때 개인적으로는 별로라고 생각했다. (당시 네이밍은 중요하지 않다며 어떤 이름이라도 브랜딩은 하기 나름이라고 얘기했던 브랜드 마케터 분들, 솔직히 그때는 안 믿었지만 지금은 믿습니다.) 베트남에 민트색을 사용하는 브랜드가 없어서 한국과 같이 민트색을 사용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길에서 배민 라이더 분들이 가장 눈에 띈다.

배민 베트남의 CTO로서 그동안의 내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CTO의 롤에 대해 그동안 많은 분들이 여기에 대해 좋은 생각들을 공유해주셨고 나는 그동안 읽은 대부분의 의견에 동의한다. 3년차 개발자의 역할이 소규모 스타트업, 중견 기업, 대기업에서 다르고 그들이 속한 도메인에 따라 다르듯이 CTO의 역할도 그들이 처해있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크게 다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이나 맥락에서도 꼭 수행해야 하는 두가지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기술 조직의 리더 역할과 회사의 매니지먼트 팀의 일원이라는 역할이다.

베트남에 들어갈 때 대여섯명, 런칭 당시에도 겨우 열명 남짓의 원정대였던 우리의 기술 조직은 단순히 인원수에만 있어서도 열배 이상의 성장을 했다. 또한 배민이라는 낯설고 의미 없던 이름의 서비스는 이제 베트남에서 가장 넓은 지역 커버리지를 가지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이 음식 배달 앱을 떠올릴 때 대부분 처음 혹은 두번째로 떠올리는 서비스가 되었다.

이렇게 3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동안 낯선 동남아에서 기술 조직을 구축하고, 우리의 서비스를 성장시키는 동안 개인적으로는 규모와 과제에 따라 모습을 바꿔가며 적응하는 기술 조직의 리더로, 성숙한 매니지먼트 팀의 일원으로 내가 그동안 가져왔던 관점을 넓히고 성장하는 고마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팀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후 최근 몇개월간 그간 해온 일들을 돌아보며 “아, 내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는 기회를 얻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장 많이 떠올렸다.

“I feel very strange.”

마지막 근무일인 오늘, 동료들에 전할 메세지를 준비하며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이다. 코로나로 인해 오랜 재택근무 상태에 있는 지금은 그간 정든 동료들을 떠나오기에는 최악의 시간인 듯 하다. 주요 팀의 리더분들과 만나 나의 결정에 대해 설명하고 인사를 전하고 오기는 했지만 초기부터 오랫동안 함께 해온 몇몇 구성원들과는 떠난다는 인사도 하지 못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소식을 듣고 연락해 준 동료들에게 감사한 마음과 제대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할 뿐.

그러다 보니 한국에 돌아와 가족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음에 즐거운 만큼 해야 할 많은 일들과 동료들을 뒤로 하고 떠나온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이전에 회사들을 나오면서 들었던 마음과 또 다르게 미련이 남는 것은 이 따뜻하고 훌륭한 친구들과 다시 만나 일할 기회를 만드는 것이 아무래도 한 나라에 있을 때 보다야 어렵기 때문이겠지.

우아한 형제들은 성장하여 회사를 떠나는 사람에 박수를 쳐주는 회사라고 한다. (기사에서 읽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같이 일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과 별개로 앞으로의 도전에 진심어린 조언과 응원을 얻고 떠나니 그것을 믿을 수 밖에.

3년 반 동안 계속되어 온 여름은 여기서 끝이 난다. 길다면 긴 시간, 짧다면 짧다 할 수 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얻었을까? 수많은 선택과 결정, 그를 통한 배움과 성장, 호치민에 가면 언제든 반갑게 맞아줄 동료들. 오글거림에 나중에 이 글을 수정하거나 지울지도 모르겠지만 결국 요약해서 얘기하자면 그 여정이 곧 리워드였다.

2022 BAEMIN TECH Hoodie